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문단 편집) == 생애 == [[로마 제국]]의 속주인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현재의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의 수도 코르두바에서, 귀족 마르쿠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와 헬비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네카의 아버지 마르쿠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기록에 따르면 80세가 넘는 나이로 장수했다. 만약 그 아들도 네로에 의해 자결을 명령받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만큼 오래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젊은 시절부터 당시 히스파니아 코르두바 지방의 토호이자 지방관으로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의 3대 황제를 보좌했으며 아들에 못지 않은 뛰어난 수사학자였기 때문에 대 세네카(Seneca the elder)라고도 부른다.[* 당시 세네카 가문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가문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세네카가 [[그리스]]의 대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로마의 위대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의 거부(巨富)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한편, 어린 세네카는 친한 이모에 의해 어린 시절 교육을 위해 로마로 보내졌고 그 곳에서 성장했다. 이 시기에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 아탈로스,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소티온에게서 철학 강의를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네카가 심한 [[천식]]으로 인하여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이모는 세네카를 데리고 남편인 가이우스 갈레리우스가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던 [[이집트]]로 가서 약 6년간 요양 생활을 보냈다. 31년, 세네카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방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재무관에 임명되어 원로원에 입성하였으며, 뛰어난 웅변실력으로 금새 원로원을 대표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세네카에게 갑작스런 위기가 찾아왔다. 서기 37년,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젊은 황제 [[칼리굴라]]가 세네카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칼리굴라는 스스로 뛰어난 연설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네카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연설가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칼리굴라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은 세네카를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굴라는 "세네카의 폐병이 진행하는 단계에 있고, 그래서 좋은 시절이 오기도 전에 죽을 것"이라는 여성 정보원의 얘기를 들었다. 칼리굴라는 그 진술을 믿을 정도로 정보원을 신뢰했고, 그래서 세네카를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칼리굴라는 세네카의 처형을 취소하고는 그 처벌을 가벼운 벌금형으로 대신했다. 세네카는 한숨을 돌리고는 바로 공직 생활에서 물러났다.[* On the other hand, Lucius Annaeus Seneca, who was superior in wisdom to all the Romans of his day and to many others as well, came near being destroyed, though he had neither done any wrong nor had the appearance of doing so, but merely because he pleaded a case well in the senate while the emperor was present. 8 Gaius ordered him to be put to death, but afterwards let him off because he believed the statement of one of his female associates, to the effect that Seneca had a consumption in an advanced stage and would die before a great while. [[https://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Cassius_Dio/59*.html|#]]] 41년, 칼리굴라가 죽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로마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세네카는 다시 복권되었다. 하지만 또 다시 시련이 다가왔다. 클라우디우스 세번째 부인 메살리나가 클라우디우스의 관심을 받는 율리아 리빌라를 질투해서, 간통했다는 날조된 명분으로 그녀를 추방시켰는데, 이때 그 간통의 상대자로 지목된 것이 바로 세네카였다. 세네카가 지목된 이유는 확실하진 않지만 그의 유명세가 원로원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남편 클라우디우스에게 독이 될 것이라는 메살리나의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세네카는 [[코르시카]]로 끌려가 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유배가기 몇 주 전 외아들을 잃기까지 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위로문(Consolationes)이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을 썼다. 기약없는 유배 생활은 메살리나가 쿠테타 음모로 살해되고 새로이 황제의 부인이 된 아그리피나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연설가인 세네카를 네로의 가정교사로 삼기로 결심하면서 끝이 났다. 세네카는 49년 로마로 다시 돌아와 치안관이 되었고, 51년에는 네로의 후견인으로까지 임명되었다.[* 이무렵 공화정 시대부터 유력한 귀족 가문 폼페이우스 가(家) 태생의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재혼했다.] 이런 전폭적인 승진이 가능했던 이유는 세네카의 명성이 아들 네로에게 정치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아그리피나의 계산이 있어서였다. 대부분의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54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아내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당해 사망했으며, 이제 그녀의 의붓아들 [[네로]]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세네카가 클라우디우스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단,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옛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조롱한다. 아무튼 당시 17세였던 젊은 네로가 권력을 잡으면서, 세네카는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라는 근위대장[* 당시 로마 도시 내에서는 근위대를 제외한 군사조직이 활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근위대장은 그야말로 권력의 최고 중심부에 위치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맞게 된다.]과 함께 정치 고문 및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55년 마침내 세네카는 네로로부터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의 자리를 수여받았다. 그 후 8년 동안 세네카와 부루스는 사실상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그들이 젊은 황제 네로를 통해 통치한 그 기간은 "로마 제국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훌륭하고 공정한 정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상보다는 타협과 외교에 기반을 둔 세네카의 정책은 무척 효율적이었다. 세네카는 아그리피나의 손에 막강한 왕권을 부여하는 것은 피하면서 젊은 네로의 넘치는 혈기를 억제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따라서 네로가 세네카의 조언을 따르는 동안, 세네카와 부루스는 그 권력으로 지방 총독의 부패를 쫓아내면서 간접세 인하와 같은 일련의 법적 및 재정적 개혁을 촉진할 수 있었고, 아르메니아에서는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세네카와 부루스는 상원의원 이상의 어떤 제도적 지위도 보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로는 자라면서 조금씩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네로는 은밀하게 세네카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하나둘씩 제거했고, 이후 세네카는 점차 제자 네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58년에는 네로의 고문인 수일리우스가 세네카를 다음과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 세네카는 고리대금업을 해서 어마무시한 돈을 벌었으며 심지어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도 동침했다는 것이었다. 젊은 고문에 불과한 수일리우스가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이렇게 모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네로의 묵인과 허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게 학자들의 추측이다. 실제로 황제 네로는 이후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죽인다. 그래서 수일리우스의 고발이 사실을 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심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세네카가 당시에 부자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59년, 네로는 결국 자신의 연애에까지 과도하게 간섭하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죽였다. 세네카는 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네로 황제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황제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아그리피나의 부정을 비판하는 그 연설을 했던 것이었다. 강요가 있었는지 아니면 로마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대승적 판단이었는지는 세네카 자신만이 알겠지만, 그는 이 연설로 인해 후대 사람들에게 위선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62년, 정치적 동료였던 부루스마저 죽게 되자, 세네카는 로마를 위해서든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네로에게 전 재산을 바치면서 공직에서 은퇴할 것을 요청했다. 퇴직은 암묵적으로 승인되었지만 재산 환수는 몇 년 후까지 수락되지 않았다. 세네카는 점점 위험해지는 로마 궁정에서 물러나 두 번째 부인인 파울리나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좌절과 도피의 시기에 세네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네카는 이전 제자 네로의 강박적인 도착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65년에 세네카는 [[피소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네카는 그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음모를 사전에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결국 세네카는 네로로부터 자살을 명령받게 된다. 세네카는 그 명령이 적힌 편지를 받고서는 유언장을 쓰게 해달라고 네로에게 부탁했지만 단칼에 거부당했다. 그 거부에 세네카는 자신의 유산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삶의 이미지(imago vitae suae)'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결국 세네카는 자신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고는, 자신의 정맥을 칼로 베어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자 세네카는 자신의 주치의에게 독미나리를 부탁하여 마셨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뜨거운 욕탕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천식을 앓던 세네카는 그곳에서 질식하여 숨을 거뒀다. 죽기 전, 욕탕에서 세네카는 하인들의 이마에 물방울을 뿌리면서, 그 물방울이 '[[제우스]]에게 바치는 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네카가 죽은 이후, 세네카의 조언이 사라진 [[네로]]도 폭정으로 민심을 급격하게 잃어버려 얼마 가지 않아 원로원의 반란을 마주하고 68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